풍경보다 사람이 더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다
동해 여행 / 셋째 날
천곡동 숙소에서 새벽 일찍 일어났다. 추암 해돋이를 보러 가기 위해서다. 숙소 밖을 나서니 어둡고 바람 불고 춥다. 그동안 추암 해돋이를 보러 간 게 열 번도 넘은 것 같은데, 정작 ‘예쁜 해돋이’를 본 적은 없다. 예쁜 해돋이란 사진 찍는 사람들에겐 수평선에서부터 빨갛게 솟아올라오는 듯한 일명 ‘오메가’ 모양의 해돋이를 말한다. 한때 나도 오메가 해돋이를 찍으러 동해안을 따라가며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수도 없이 시도해 봤지만 딱 한 번, 양양 낙산사 앞에서 찍고는 그 뒤로 찍은 적이 없다. 굳이 찍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벽에 일어나기도 힘들고, 대체 눈으로, 가슴으로 감상하면 됐지, 왜 그리 사진에 집착하는지 나 자신이 좀 모자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캄캄한 밤에 실로 오랜만에 무거운 삼각대까지 들고 추암 촛대바위 앞에서 오메가 해돋이를 기다렸다. 원래 촛대바위 앞에 걸린 해돋이를 찍는 게 ‘정석’이지만 그건 여름철에나 가능하고 겨울에는 불가하다. 삼각대를 펼치고 해를 기다리는데 수평선에 검은 구름이 가득하다. 오늘도 틀린 것 같다. 해돋이를 보러 주변에도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붉고 동그란 해는 보지 못했지만 대신 사위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그 은은한 빛깔이 좋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조용히 해돋이를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과 그 얼굴에 비춘 고운 빛이다. 사람이 풍경보다 더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
촛대바위 밑 계단으로 내려가면 무리를 이룬 기암괴석이 보이고 한편에 작은 정자가 보인다. 해암정. 고려 공민왕 때 높은 벼슬을 지낸 심동로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와 살려고 세웠다. 해암정 뒤쪽으로는 기암괴석이 병풍을 둘렀고, 앞쪽으로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자연 속에 스며들어 한데 어울리는 선조들의 조경 안목은 늘 감탄스럽다.
해암정을 지나면 출렁다리 가는 길로 이어진다. 군사작전 지역이라 동절기에는 아침 9시에 문을 열어 오후 8시에 닫는다. 72m 길이의 출렁다리는 이름과 달리 출렁거리지는 않는다. 다리에서 보는 추암해변의 모습이 아름답다.
출렁다리를 건너면 이번에는 추암조각공원이 기다린다. 공원은 37,500㎡(약 11,400평)의 부지에 만든 야외 조각 전시장으로 바다와 자연을 주제로 한 국내 유명 조각가 30여 명의 조각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속풀이 곰치국과 인심 따뜻한 빵
새벽부터 일어나 추암해변을 쏘다니다 보니 어느새 10시. 배가 고프다. 겨울철 동해에 오면 꼭 먹고 가야 하는 의무 같은 음식이 있다. 곰치국. 추암에서 다시 차를 몰고 묵호진동으로 향했다. 창가 식탁에 앉으면 새파란 바다가 보이는 '동해바다곰치국'에 갔다. 시원한 곰치국 한 그릇을 먹고 나니 얼었던 몸도 풀리고 간밤의 술독도 다 빠져나간 듯 상쾌하다.
동해에 맛있는 빵집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에 찾아가 봤다. 효자남길(동회동) 동보상가에 있다고 했는데 도무지 찾지를 못해 주변을 한참 뺑뺑 돌았다. 찾고 보니 상가 맨 끝자리에 있었다. 추운 데 헤매고 다녀서인지 내 얼굴에 몹시 추운 티가 났나 보다. 빵집 주인이 “많이 춥죠” 하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따뜻한 커피와 갓 구운 빵 몇 조각을 내왔다. 알고 보니 강릉의 유명한 교동빵집 창업주 아들이 운영하는 빵집이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고 가족에게 줄 빵을 사서 나오는데 빵집 주인은 먼 길 조심해서 가시라고 문밖까지 나와 배웅해줬다. 빵과 커피 맛도 좋았지만, 빵집 주인의 따뜻한 인심과 친절이 너무나 고마웠다.
여행지에서 이런 기억은 오래간다. 게다가 특정 사람에게 받은 친절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동해 사람들은 다 친절하다는 기억으로 남는다. 묵호항 활어센터에서 당한 봉변은 교동 빵집에서 받은 친절로 상쇄하고도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