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부모님이 동시에 입원과 수술을 하시는 바람에 병시중하느라 몹시 힘든 나날이다. 병 들고 연로하시니 이제 모든 것을 누가 대신 해드리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왔다. 출근하는 나보다는 매일 두 분이 계신 병원과 집으로 오가는 아내의 고생이 극심하다.
어젯밤 너무나 지쳐 보이는 아내가 안쓰러워 위로한답시고 아무 생각 없이 집에 있던 와인을 한 병 땄다.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병뚜껑이 날고 거품이 용솟음치며 옷과 마룻바닥에 반이나 엎지르고 말았다. 발포성 와인, 샴페인이었다.
아내는 놀라 얼빠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위로는커녕 일을 더 만드는구먼. 괜찮아. 그런 손재주로 여태껏 가족 안 굶기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용하다”며 위로했다. 인정한다. 손끝이 야무지지 못한 나는 이런 저지레를 가끔 한다.
와인을 마시며 우리는 다가올 노후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어찌어찌 살자고 다짐했다. 와인 한 잔에 살짝 취기가 돈 아내가 말했다. “툭하면 인생이 술 한잔 안 사준다고 불평하는데 이제 하지 마요. 아무리 기다려도 안 사줄 거야, 대신 내가 사줄게”라며 감동적인 멘트를 날렸다. 나 비록 손재주는 박복하나 지지리 복도 많은 놈의 팔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술 한잔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 정호승 시집《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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