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 여행 / 첫째 날
망상해변에서 겨울 바다와 대면하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망상해수욕장이다. 겨울 바다가 보고 싶었다.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감옥살이하며 탁 트인 바다가 몹시 그리웠다. 해수욕장 입구에서 체온 측정을 하고 연락처를 적었다. 사방이 탁 트인 허허벌판에서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은 모래밭에 세운 강렬한 빨간색 시계탑과 조형물에 날아가 버렸다. 조형물엔 ‘2020 망상’이란 영문 글자와 함께 ‘마음이 동해’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사람이 없다. 이 유명한 해수욕장에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지경이다. 해변을 따라 걷고 있는데 드디어 저 멀리 젊은 연인 한 쌍이 나타났다. 평소 사람 북적이는 걸 질색해 피해 다니던 내가 사람을 반가워하다니 이 무슨 조화인가 싶다.
망상해수욕장에서 나와 가까이 있는 망상 오토캠핑리조트에 들어섰다. 국내 최초의 자동차 전용 캠핑장인데 지난해 동해시 산불로 건축물의 80% 이상이 불타고 해송 군락지도 훼손되는 참사를 당했다. 빠르게 복구해 다시 운영하고 있는데 기존 숙소가 목재로 이뤄져 산불 피해가 컸던 만큼 이번에는 콘크리트, 석재 등 내화성이 뛰어난 자재로 복구했다고 한다. 산불 재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서인지 산불 피해를 보지 않은 캐라반에 ‘산불생존’이라고 빨간 글씨를 써놨다. 케빈하우스, 캐라반, 게스트하우스, 자동차캠핑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편의시설이 잘 돼 있어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인기 높은 곳이다.
캠핑장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는 망상해변한옥마을이 있다. 바다를 마주한 곳에 보기에도 튼튼하고 깔끔하게 잘 지은 한옥이 들어서 있어 색달라 보였다. 한옥 9동에 방이 22개 있다.
*망상오토캠핑리조트.http://www.campingkorea.or.kr/main/index.htm
논골담길엔 등대가 있고 재치와 유머가 있다
점심을 먹으러 묵호 중앙시장에 왔다. 싸고 맛있는 칼국숫집이 있어서다. ‘대우칼국수’에서 장칼국수 한 그릇(5천 원)을 먹고 중앙시장 야시장에 들렀다. 원래는 금요일과 토요일 밤에 야시장이 섰는데 코로나 때문에 장이 안 선지 꽤 됐다고 한다. 야시장 입구에는 만 원짜리 돈다발을 물고 있는 개(犬) 동상이 서 있다. 중앙시장은 묵호항 개항 이후에 자연적으로 생겼는데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넘쳐나 상업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거다. 개도 돈을 물고 다녔다는 얘기는 한때 번영했다 쇠락한 곳을 이를 때 자주 쓰는 비유이긴 한데 개로서는 좀 억울하지 않을까. 개가 돈을 물고 간들 개집을 살 수 있나, 사료를 사 먹을 수 있나, 술을 사 먹을 수 있나.
자연산 생선만 판매하는 묵호항 활어판매센터 역시 평소와 달리 너무나 한산했다. 손님은 고작 대여섯 명뿐이고 상인들만 어두운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시장에서 한 해에 적어도 한두 번은 꼭 와서 회를 떠 가던 내 마음도 무거워졌다. 한 바퀴 둘러보고 있는데 누가 사진 찍지 말라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젊은 여성 상인이었다.
“사진 안 찍었는데요.”
“찍었잖아요.”
“사람 얼굴은 안 찍었어요. 못 믿겠다면 카메라 보여드릴까요?”
“찍는 거 다 봤어요. 아저씬 누가 따라다니며 사진 찍으면 좋겠어요?”
얼굴을 찍지도 않았고 찍혔다 한들 전부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있어 알아볼 수도 없는데 대체 왜 이러나?
그녀 눈빛과 목소리에 악이 잔뜩 받쳐 있었다. 장사는 안되고 성질은 나는데 지나가던 내가 운 없이 걸려든 것 같다. 평소 이런 일을 당하면 못 참는 성미지만 애써 성질을 누르고 그냥 미소만 날려줬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기분은 안 좋았다. 여행지에서 이런 기억은 오래간다. 게다가 한 사람에 대한 불쾌함이 아니라, 이 시장 전체에 대한 기억으로 남는 게 문제다.
묵호등대로 향했다. 등대 앞을 묵호등대 해양문화 공간으로 꾸몄다. 등대가 바다 대신 육지 높은 곳에 있다. 1941년 개항한 묵호항은 무연탄 중심의 무역항 역할과 함께 어항으로도 발전했다. 그래서 1963년에 등대를 세웠다. 여기서 동해는 물론 백두대간의 두타산, 청옥산, 동해시까지 다 보여 논골담길과 함께 명소가 됐다.
등대에서 골목길을 따라 논골담길을 돌아볼 차례다. 이 길은 6, 70년대에는 물지게를 진 사람들이 옆으로 비스듬히 서야만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비탈길이었다. 지금은 마을의 골목길과 담벼락을 갖가지 벽화로 꾸며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다. 매일 새벽 명태와 오징어를 실어 나르는 어선들로 활기를 띠었던 묵호항을 배경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인생 스토리가 벽화의 주제이자 소재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절로 입가에 웃음이 지어질 만큼 따뜻하고 정겹고 해학적이다.
골목 구경은 등대에서 묵호항 쪽으로 내려가며 해도 되고, 반대로 묵호항에서 등대 방향으로 올라가며 해도 된다. 길바닥에 ‘등대오름길’, ‘바람의 언덕 가는 길’로 표시돼 있다. 요리조리 연결된 좁은 골목길을 지나며 구경하는 벽화가 재밌기도 하고 사진 찍기도 좋아 젊은 층들이 많이 찾는다.
좀 전에 당했던 불쾌한 봉변도 재치 있고 유머 있는 논골담길 벽화를 보고 유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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