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밖에 없다. 문장에서도 그대 능가할 자가 없고, 100년 만의 재상 재목도 그대밖에 없다”. 정조대왕은 다산 정약용을 이렇게 평했다. 하지만 정조가 세상을 뜨자 다산은 정쟁에 휘말려 일가는 몰살을 당하고 그는 강진으로,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며 <목민심서>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 6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어쩌면 그가 벼슬 대신 유배를 왔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강진 땅에 남긴 다산의 자취는 아직도 곳곳에서 생생하다.
주막집 뒷방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사의재. 오갈 데 없는 다산의 딱한 사정에 동성리 동문 밖 주막의 주모가 뒷방 한 칸을 내줬다.
강진읍 사의재는 다산이 강진에 유배와 처음 4년 동안 기거했던 곳이다. 오갈 데 없는 다산의 딱한 사정을 알고 동성리 동문 밖 주막의 주모가 뒷방 한 칸을 내준 것이다.
견디기 힘든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중, 주막 할머니로부터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를 듣고 마음을 추슬러 1년 만에 학당을 개설하고 제자를 받았다. 다산은 사의재(四宜齋), 즉 ‘네 가지(생각, 용모, 언어, 행동)를 올바르게 해야 할 방’이란 뜻의 이름을 짓고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사의재 뒷마당에 있는 주모상
2007년 강진군에서 복원한 사의재는 정겨운 초가집과 함께 아름다운 정원과 연못을 가졌으며 뒷마당에는 다산을 돌봐줬던 주모와 딸을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 초가 한 칸에선 예전처럼 동문주막이란 간판을 내걸고 음식과 동동주를 파는데 음식 맛도 좋고 깔끔하다. 가까운 곳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 생가가 있다.
다산을 제대로 알려면 도암면의 다산유물전시관을 가봐야 한다. 다산의 업적, 저서 등을 전시하고 있는데 어떻게 한 사람이 정치, 경제, 과학, 의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저렇게 해박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대표적인 저서로 꼽는 <목민심서>는 지방행정의 일선 책임자인 목민관, 즉 수령들의 행정지침서로서 고을에 부임하는 날부터 퇴임할 때까지 지켜야 할 사항들을 기록한 책인데 현재까지도 많은 위정자의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 호찌민도 목민심서를 곁에 두고 읽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올해는 목민심서가 세상에 나온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다산초당에서 500여 권의 책을 썼다
다산초당 가는 들머리에는 큰 나무에서 뻗어져 나온 뿌리가 울퉁불퉁 길을 덮고 있어 ‘뿌리의 길’이라 부른다.
다산초당 가는 들머리 산길은 특이하게도 큰 나무에서 뻗어져 나온 뿌리가 울퉁불퉁 길을 덮고 있다.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이름 지었는데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고 하였다.
다산이 머물며 방대한 저서를 쓴 다산초당. 초당 앞 큰 바위는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이던 다조
다산이 바위에 직접 새긴 정석. 아무런 수식 없이 자신의 성만 새겨 넣었다.
다산은 1808년 봄,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의 산정(山亭)에 놀러 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웠던 이곳에 반해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거처를 옮긴 다산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다산초당에서 머무는 10년 동안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했다. 다산초당은 결과적으로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 공간이자 조선시대 실학의 산실이 된 셈이다. 다산이 직접 바위에 새겼다는 정석(丁石),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약천(藥泉),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이던 다조, 바닷가의 돌을 주워 만든 연지석가산 등의 ‘다산4경’이 있어 다산의 자취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다산초당’이란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 모각한 것이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에 있는 천일각. 멀리 강진만이 바라보인다.
다산초당에서 오른쪽 길로 가면 보정산방과 다산동암이 나오고 이어 전망 좋은 곳에 날아갈 듯 날렵한 정자 천일각이 세워져 있다. 다산이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로 유배 간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쓸쓸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란 생각으로 후대에 지운 누각이다.
강진에 귀양 오기를 참 잘했구나
백련사 부도전 앞에 마치 땅에서 피는 꽃인 듯 동백꽃이 떨어져 있다.
다산에게는 혜장선사라는 벗이 있었다. 다산초당에서 오솔길 따라 30여 분 거리에 있는 백련사의 주지였던 혜장은 뛰어난 학승으로 학식과 식견이 높았다. 다산과 혜장은 수시로 만나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짓고 차를 즐겼다. 다산은 혜장이 비 내리는 깊은 밤에도 기약 없이 다산을 찾아오곤 해서 밤 깊도록 문을 열어두었다고 한다. 천일각 앞의 안내 팻말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다산과 혜장이 서로를 찾아 오가던 이 오솔길은 동백숲과 야생차가 아름답다. 그러나 이 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친구를 찾아가는 설렘일 것이다. 보고 싶은 친구를 가진 기쁨, 친구를 찾아가는 길의 행복.”
친구를 찾아가는 마음으로 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걸어가니 만덕산 자락에 자리한 백련사가 나온다. 봄이면 절 앞의 빽빽한 동백숲이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며 화려한 꽃불을 지핀다. 절에서 바라보는 너른 강진만의 조망도 일품이다. 아마도 다산초당에서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던 다산에게 백련사 가는 아름다운 오솔길은 큰 위안과 휴식처가 됐을 것 같다.
다산은 한때 절망에 빠져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강진에 내려온 후 “내가 강진에 귀양 오기를 참 잘했다. 강진이 내 고향 땅 아니란 말 믿지 않으리”라고 말할 만큼 강진의 인심과 자연에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만일 다산이 강진에 유배를 오지 않았다면 이처럼 방대한 저술과 학문을 후대에 남기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중앙에서 쫓겨나 초라하게 유배 온 한 사내를 따뜻하게 품어 거목으로 키워낸 건 팔 할이 ‘강진의 힘’이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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