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남도진성. 삼별초 배중손은 남도진성으로 퇴각했다가 전사했다.
진도대교를 배경으로 서 있는 이순신 동상. 이순신은 대교 아래 명량해협(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이용해 왜적의 배를 섬멸했다.
ⓒ진도군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해남을 거쳐 진도대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너른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이순신 상과 판옥선이다. 이곳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로 명량해협(울돌목)의 빠른 물살을 이용해 왜적의 배 130여 척을 무찌른 세계 해전사(海戰史)에 길이 남을 전투를 벌인 현장이다.
일본은 1597년(선조 30년) 임진왜란에 이어 다시 조선을 침략하는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순신이 없는 틈을 이용해 전라도 해안을 침공했다. 이미 원균의 조선함대는 전멸하다시피 한 상태. 다급해진 조정에서는 모함으로 옥에 갇혀 있던 이순신을 재등용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장군은 남은 수병 1백20명과 전선 12척을 거두어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정부에서는 그 정도로는 일본 수군과 대적할 수 없으니 수군을 포기하고 육지전투에 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순신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장계를 올려 수군 폐지 불가론을 펼쳤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순신은 적을 울돌목으로 유인해 왜선 130여 척을 대파했다. 이순신의 빼어난 전략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비장한 결의로 전투에 임한 성과다. 이런 대승을 거두게 된 배경에는 병사뿐 아니라 많은 진도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크게 기여했다. 진도의 유명한 전승놀이인 강강술래 또한 왜군에게 우리 병력이 많음을 위장하기 위한 이순실의 전술이란 설이 있다. 고군면 벽파진엔 진도 군민들이 모금해 세운 이충무공 전첩비가 있다.
삼별초 배중손의 동상과 위패를 봉안한 배중손 장군 사당
삼별초,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
벽파진 이웃한 곳에는 용장성이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 이 산성은 1270년 고려 원종이 몽골에 항복하고 굴욕적인 강화를 맺자 삼별초가 이에 불복하여 강화에서 배를 타고 진도에 내려와 항쟁하던 곳이다.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溫)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강화도에서 1000여 척의 배에 재물과 사람을 싣고 무려 두 달 보름의 긴 항해 끝에 진도에 다다른다. 그들은 용장성에 터를 잡고 성을 개축하고 궁궐을 지었다. 아예 새로운 정부를 세운 것이다. 진도를 택한 이유는 해전에 약한 몽골군과 싸우기 적합한 데다 진도 땅이 기름져 자급자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별초의 거센 항거에 고려와 몽골은 1271년 고려 장수 김방경과 몽골장수 홍다구를 지휘관으로 여몽연합군을 편성, 진도공략을 개시했다. 10여 일의 전투 끝에 임금 온은 비참한 죽임을 당했고, 배중손은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남도진성으로 퇴각했다가 전사했다. 그러나 김통정은 살아남아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로 건너갔다. 이 싸움으로 진도 주민 1만여 명이 포로로 몽골에 끌려가 22년 만에 되돌아오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제주도로 간 삼별초는 2년간 더 항쟁을 벌였으나 1273년 여몽연합군에게 패함으로써 삼별초의 명은 다 하고 만다. 이후 고려 왕실은 몽골의 부속정권으로 전락해 100여 년을 보내게 된다. 고려의 어린 왕들은 어릴 때 원나라에 가서 생활해야 했고, 원나라 공주와 혼인을 한 뒤에야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운림산방. 소치 허련부터 4대를 이어온 남종문인화의 산실이다. 뒤쪽엔 첨찰산이, 앞쪽엔 연못이 펼쳐진다.
위기 때마다 활활 타오른 촛불
진도는 한국문화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우리나라 민속문화의 보고(寶庫)라고 불린다. 노래, 굿, 놀이, 그림 분야에서 많은 인재와 인간문화재를 배출했다. 진도는 고려시대부터 유배지였다. 조선시대에는 “진도에 유배자가 너무 많아 섬 사람들이 그들 먹여 살리다 굶어 죽을 판이니 다른 곳으로 옮겨 달라”고 건의했을 정도다. 유배자들 대부분이 학문과 사상이 깊어 진도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영향을 받았고, 진도의 문화형성에 큰 기여를 했다.
의신면 사천리에 있는 운림산방은 남종문인화의 산실이라 불린다.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은 스승인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나자 1856년 9월 49세에 고향인 진도로 돌아왔다. 그는 운림산방을 짓고 작고하던 84세까지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소치 허련 이후에도 미산 허형, 남농 허건, 임전 허림까지 4대에 걸쳐 전통을 이어왔다. 운림산방은 뒤쪽으로는 첨찰산이, 앞쪽으로는 연꽃 가득한 커다란 연못이 펼쳐지는데 풍경 또한 한폭의 동양화 같다. 운림 산방 옆에는 고찰 쌍계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조로 꼽히는 세방낙조 전망대에서 해넘이를 기다린다. 진도 바다는 아름답고 비장하다. 모함으로 억울한 옥살이까지 하고도 다시 전장에 나가 백의종군하다 전사한 이순신, 나라에 버림 받았으나 강화도에서 저 먼 진도까지 내려와 항전한 삼별초의 불굴의 정신. 이들을 도와 목숨 바쳐 함께 싸웠던 이름없는 수많은 민초들.
이 나라 역사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정신의 불씨가 위기 때마다 촛불처럼 활활 타올랐기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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