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선생님인 딸이 올해 담임을 맡은 반에 학폭 전력이 있는 학생이 세 명이나 배정됐다고 걱정이다. 여학교 학폭은 남학교와 달리 신체 폭력 대신 주로 언어 폭력이라고 한다. 학폭이라 하면 주로 학생이 학생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연상하지만, 나는 교사가 학생에게 폭력을 무시로 가하는 시대에 학교를 다녔던 터라 교사 폭력이 먼저 떠오른다. 딸에게 혹시 아직도 선생이 학생을 때리는 일이 있냐고 물으니 요샌 그랬다간 바로 교사직 아웃이란다.
7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학생 폭력은 당해본 일이 없지만 교사 폭력은 꽤 많이 당했다. 우리 때도 학교에 폭력 써클이 있었고, 지네끼리 서열 싸움이나 세력 싸움을 하는 일은 있어도, 이유 없이 약한 아이를 괴롭히는 걸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선생님 중 일부는 교사라는 압도적 지위를 이용해 학생에게 차별과 납득할 수 없는 폭력을 가하곤 했다.
고등학교 때 폭력 써클의 넘버2라는 녀석이 체육 시간에 교실에 남아 내 도시락을 몰래 다 까먹었기에 손을 좀 봐준 일이 있었는데 학생과에 불려 가 나만 혼났다. 억울했다. 넘버2는 학교에서 크고 작은 사고를 자주 일으키는 말썽꾸러기인데 이상하게도 모든 선생이 지나칠 만큼 우호적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국내 내로라하는 재벌가의 자손이었다. 그때 학생과 선생 이 내게 영화 <친구>의 한 대사처럼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투로 물었는데 대답하기 싫어 입 꾹 다물고 있다가 몇 대 더 맞았다. “우리 아버지가 뭐 하시는지 알아서 뭐 하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더 맞을 것 같아 참았다.
반 대항 합창 시합이 있었다. 음악 선생이 10명씩 불러 음계를 불러보라면서 합창단원을 추려냈다. 마침, 난 그때 변성기였던 터라 발성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선생은 학교에서 가까운 아무개 절에 가서 염불이라 외우라고 조롱하며 지휘봉으로 내 까까머리를 때렸다. 얼마나 아팠던지 눈물이 찔끔 나왔다. 변성기가 맞을 죄인가? 학교를 때려치우고 진짜 절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 뒤부터 노래방이 유행하기 전까진 일절 자발적으로 노래를 하지 않았다. 꼭 해야 할 때는 입만 뻥긋거렸다. 훈련소에서도 군가를 입만 뻥긋거리다가 걸려 호되게 얼차려를 받았다.
청소년기에 학교에서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인생에 있어 큰 행운인데 난 그런 복은 없고 불행하게도 나쁜 기억만 남아 있다. 지금 생각해도 못내 아쉽다. 교사라는 직업은 한 학생의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엄중한 직업이니 반드시 교육자로서 사명감과 소명의식 있는 사람만 택해야 한다. 학폭 전력 학생이 내 딸을 만나 1년 뒤에는 모범적인 태도의 학생으로 변하고, 졸업한 뒤에도 내 딸을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한다면 내 학창 시절의 아픈 기억도 보상이 될 것 같다. 딸에게 도움 될 만한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생각나는 건 없고, 내 옛날얘기만 주절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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