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월출산 자락 아래 도갑사에 도착했다. 도갑사는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도갑사에 여러 번 왔지만 도갑사 하면 떠오르는 건 ‘기진맥진’이다. 월출산 산행을 하면 늘 천황사에서 시작해 도갑사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거의 10km에 이르는 긴 산행 끝에 지쳐 도갑사에 이르면 택시 부르기에 바빴지 절을 찬찬히 살펴볼 여력이 없었다.
도갑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해탈문(解脫門)을 통과한다. 속세의 번뇌에서 벗어나 근심없는 부처님의 품 안에 들어선다는 의미이다. 문득 해장문(解腸門)도 있어 문을 통과하면 간밤의 숙취에서 벗어나 맑은 심신을 되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 마당에는 스님도 여행객도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적막했다. 대웅전과 그 앞에 고려시대 쌓은 아담한 오층석탑이 나왔다. 경내에는 물이 가득 담긴 길이가 4m가 넘는 조선시대 만든 거대한 석조(石槽)도 있다. 월출산에서 내려오면 이 석조에서 물을 떠 벌컥벌컥 마셨던 기억이 난다.
대웅전 뒤편 산신각 앞에는 키다리 노송이 하늘을 향해 날아갈 듯 서 있는데, 마치 동양화 한 폭을 그려놓은 것 같다. 산신각 옆길로 가면 월출산 등산로가 나온다. 그 길에 석가여래좌상을 모신 미륵전이 나오는데 스님이 거의 한 시간 가까이 독경을 하고 있어 석가여래좌상의 옆 모습만 슬쩍 보고 나왔다. 미륵전에서 나와 산길로 조금 더 올라가면 도선국사비각이 나온다.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와 중창한 수미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도선수미비가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에 무려 17년이나 걸려 만든 비로 키가 4.8m에 이를 만큼 장대하다. 그 옆으로는 부도전이 펼져진다.
두 시간가량 도갑사에 머물다 다시 해탈문을 지나 주차장으로 돌아가는데 몸이 가볍다. 그새 간밤의 숙취가 말끔히 가시고 청량한 기운이 몸에 스며든 느낌이다. 이제부터 도갑사에 대한 기억은 ‘기진맥진 도갑사’에서 ‘청량한 기운 도갑사’로 바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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