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고래 대학살
흑산도 하면 홍어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고래잡이로 유명했다. 한반도에서 포획된 고래의 25% 이상이 흑산도 근해에서 잡힐 만큼 흑산도는 고래잡이의 중심지였다. 이 시기에 약 1만 마리의 고래가 포획된 것으로 추산한다.
일제는 흑산도 예리에 ‘대흑산도 포경근거지’를 설치해 조선총독부 직원을 파견하고, 포경 허가권을 쥐고 고래잡이를 독점했다. 일본인들도 건너와 예리에 일본인 어촌을 형성해 한때 100여 명이 거주하기도 했다. 이들은 마을에 일본 신사를 지어 신사 출입구를 상징하는 ‘도리’를 고래뼈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흑산도에서 잡혀 해체된 고래고기는 시모노세키로, 고래 부산물로 만든 비료는 효고현으로 보내졌다. 당시 포획된 고래의 종류로는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 참고래, 혹등고래, 돌묵상어, 돌고래 등이었다. 해방 후에도 한동안 고래가 잡혔는데 고래가 잡혀 오면 이 일대는 구경하러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이처럼 수십 년간 지속된 무분별한 고래 남획으로 흑산도 근해의 고래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흑산도 고래잡이는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아 있다. 그나마 2010년 과거 고래 해체 작업장이 있던 자리에 ‘고래정원’을 조성해 고래 모형물을 설치해 놓긴 했지만, 대다수 관광객은 ‘뜬금없이 웬 고래?’하는 표정으로 스쳐 지나간다. 주민들은 이곳을 ‘고래판장’이라고 부른다.
영산포까지 나 홀로 익어간 홍어
흑산도 사람들은 생홍어를 먹는다. 삭힌 홍어는 흑산도 고유의 음식이 아니다. 예전에 흑산도에서 생선을 잡으면 배에 싣고 영산강을 따라 내륙과 연결된 포구인 나주 영산포로 팔러 왔다. 풍랑이 거셀 때는 한 달 이상이 걸리기도 했다. 그새 생선은 다 썩어버렸지만, 홍어는 썩지 않고 발효가 되었다. 곰삭은 홍어를 먹어보니 새콤하고 톡 쏘는 맛이 별미였다. 그때부터 삭힌 ‘홍어’가 음식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 ‘나주 고을 사람들은 삭힌 홍어를 즐겨 먹는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래전부터 영산포를 중심으로 ‘삭힌 홍어’를 즐겨 먹은 듯하다.
홍어는 수치(수컷)보다 암치(암컷)를 높게 쳐준다. 수치는 몸집도 작고 뼈가 억세고 맛도 덜하기 때문이다. 암치와 수치의 육질은 찹살떡과 시루떡의 차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수놈은 가시가 있는 큰 생식기 두 개가 튀어나와 있어 어부들 뱃일에도 거추장스러워 잡자마자 칼로 쳐낸다. 여기서 생겨난 말이 ‘만만한 게 홍어 거시기’이다. 흑산도에서 잡은 홍어에는 바코드와 QR코드를 담은 꼬리표가 붙어 있어 흑산도 홍어인지 확인이 가능하다.
정약전과 장창대
정약전은 신유박해(1801)로 흑산도로 유배되어 사리마을에서 서당을 열고 후학을 가르쳤다. 또한 어류학서(魚類學書)인 <자산어보>를 저술했는데 흑산도 근해에서 채집한 수산물의 이름, 분포, 형태, 습성을 조사하여 기록한 책으로, 모두 3권 1책으로 되어 있다.
책상에서 글공부만 하던 정약전은 물고기 연구를 하자니 막히는 부분이 많았다. 정작 어민들도 자기가 잡은 물고기의 이름과 특성을 잘 알지 못했다. 정약전이 물고기에 대해 잘 아는 주민을 수소문했더니 주민들은 하나같이 이웃한 대둔도에 사는 장창대라는 청년을 추천했다. 장창대의 도움에 힘입어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 서문에 “나는 드디어 이분을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고 기록했다. “내가 아는 지식과 너의 물고기 지식을 바꾸자". 2021년 이준익 감독이 발표한 정약전과 장창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자산어보>의 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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