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월출산 마애불처럼 오래오래 바라보아도 좋더라, 강진

숲어진새 2019. 10. 20. 13:32

월출산 마애불처럼 오래오래 바라보아도 좋더라  강진

 

차밭 옆에 살짝 숨은 백운동 정원

월출산 옥판봉이 바라보이는 드넓은 강진다원 차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면 백운동 정원이 나온다. 한눈에 봐도 숨겨져 있는 정원이란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아주 꼭꼭 깊숙이 숨은 정원은 아니고, 세상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별서정원이다. 정원 옆의 계곡은 동백나무와 비자나무가 울창해 빛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고, 계곡 아래를 흐르는 물에는 잉어가 놀고 있다

백운동 정원은 조선 중기 처사 이담로(聃老, 1627~1701)가 계곡 옆 바위에 백운동(白雲洞)’이라 새기고 조성한 원림이다. 산수가 수려한 곳에 터를 정해 연못을 이용해 수공간을 조성하는 등 자연과 인공을 적절히 조합했다. 백운동이란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가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약사암과 백운암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건물은 다산 정약용이 1812년 이곳을 다녀간 뒤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제자 초의선사에게 백운동도를 그리게 하고 백운동 원림의 12승경을 노래한 시문을 남겨 이를 근거로 정원을 재현하게 됐다. 백운동 계곡은 담양 소쇄원, 완도 보길도의 세연정 등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꼽힌다.


                   백운동정원은 세상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별서정원이다.


                     월출산 큰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친 강진다원. 


백운동 정원을 나오면 눈이 시리도록 푸른 차밭이 펼쳐진다. 월출산은 큰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쳐져 산세가 뛰어난데 예부터 산 주변의 여러 사찰을 중심으로 차나무가 재배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월출산에서 나오는 차를 극찬했다고 한다.


천년을 마주 보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과 삼층석탑

흔히 월출산 하면 영암 땅인 것으로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전라남도 강진군과 영암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월출산(月出山)은 이름 그대로 산에 달이 걸려 있을 때의 경관이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근방에 이만큼 크고 장대한 산이 없어 마치 설악산이나 금강산을 뚝 떼어다 심어놓은 듯 도드라져 보인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암봉과 암릉이 여러 가지 모양의 기암괴석을 이루고 있어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듯해서 호남의 소금강이라고도 부른다.

그동안 월출산 산행은 늘 영암 천황사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해 도갑사로 내려오는 종주 코스만 해봤다. 이번엔 강진의 금릉 경포대에서 시작하는 코스를 택했다. 이 코스는 영암에서 시작하는 코스보다 훨씬 수월한 편이다. 이번 산행 목표는 정상인 천황봉이 아니라 경포대삼거리와 바람재삼거리를 지나 천황봉 아래 구정봉까지 올랐다가 그 아래 마애여래좌상과 삼층석탑을 보고 내려오는 것이다


                     아홉 개의 샘이 파여 있어 구정봉이라 한다.

아홉 개의 샘이 파여 있는 구정봉에 올라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었다가 마애여래좌상을 찾아갔다. 지도상에서는 주능선에서 잠시 벗어나 500m 거리에 불과했지만 가는 길이 몹시 험하다.

마애여래좌상을 마주치는 순간 일행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커다란 바위를 우묵하게 파 그 안에 불상을 새겼는데 전체 높이가 8.6m이고 불상의 높이는 7m나 된다. 무슨 연유로 이 깊고 외진 산중의 바위에 저렇게 공들여 세밀하게 불상을 새겼는지 궁금하다.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 마애여래좌상은 국보 제144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애여래좌상. 무슨 연유로 이 깊고 외진 산중에 저렇게 공들여 세밀하게 불상을 새겼는지 궁금하다.

                   마애여래좌상을 마주 보고 있는 삼층석탑


마애여래좌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삼층석탑이 있다. 삼층석탑 앞에 서니 바로 맞은편 계곡에 마애여래좌상이 보인다. 사로 마주 보고 있는 형국이다. 뭔가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이 밀려왔다. 석불과 석탑은 천년의 세월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이렇게 마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누군가를 받들고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오랫동안 변함없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갈 데 없던 다산을 주막집 아주머니가 받아줬다

잠자리는 강진 읍내 사의재다. 사의재 한옥체험관에서 꼭 한번 자보고 싶었는데 잘됐다. 잠자리는 깔끔하고 편했다. 사의재는 다산이 강진에 유배와 처음 4년 동안 기거했던 곳이다. 오갈 데 없는 다산의 딱한 사정을 알고 동성리 동문 밖 주막의 주모가 뒷방 한 칸을 내준 것이다.

견디기 힘든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중, 주막 할머니로부터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를 듣고 마음을 추슬러 1년 만에 학당을 개설하고 제자를 받았다. 다산은 사의재(四宜齋), 네 가지(생각, 용모, 언어, 행동)를 올바르게 해야 할 방이란 뜻의 이름을 짓고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예약하면 사의재 한옥체험관에서 묵을 수 있다.


                     사의재 옆에 주모와 딸의 동상을 세웠다.


2007년 강진군에서 복원한 사의재는 정겨운 초가집과 함께 아름다운 정원과 연못이 있으며 앞마당에 다산을 돌봐줬던 주모와 딸을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 초가 한 칸에선 예전처럼 동문주막이란 간판을 내걸고 음식과 동동주를 파는데 음식 맛도 좋고 깔끔하다.

강진군에서는 사의재 저잣거리라 하여 사의재, 주막과 더불어 청년 창업자들이 입점한 공방을 연계해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양한 먹을거리, 볼거리, 체험거리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가까운 곳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 생가와 세계모란공원이 있다.


전라병영성과 네덜란드에서 온 하멜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은 조선 태종 17(1417)에 설치되어 고종 32(1895) 갑오경장까지 조선조 500여 년간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 지휘부이다. 병영성 성곽의 총 길이는 1,060m이며, 높이는 3.5m, 면적은 3만 평쯤 되는데, 현재 사적 397호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전라병영성에는 군병 9,359, 군관·나졸 600여 명이 넘었고 각 지역 휘하에는 병사 규모가 5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산성이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평지에 쌓은 성이다.


                     전라병영성은 조선시대 전라도 육군의 총 지휘부였다.


최근 병영성 일대에는 다수의 함정 유구와 해자가 발굴됐다. 함정 유구는 지름 3.5~4.9m에 이르는 원형으로 위에서 아래로 가면서 좁아지며 깊이는 최대 2.5m이고 바닥에는 촘촘하게 꽂아놓은 죽창의 흔적이 발견됐다. 해자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을 둘러 파서 못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해자는 성벽 바깥쪽으로부터 약 11~17m 거리를 두고 만들어졌으며, 해자 내부에서는 나막신, 목익(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나무 말뚝) 등의 목제유물과 조선시대의 자기, 도기, 기와 조각 등이 출토됐다.

병영성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동학)을 맞아 병화로 소실되었고, 이어 1895년 갑오경장의 신제도에 의해 폐영(廢營)되고 말았다. 병영성 내의 당시 건물이나 유적은 소실되고 없으나 성곽은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의의를 고려하여 복원할 계획이다. 특히 병영성은 서양에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소개했던 하멜이 1656년 강진 병영으로 유배되어 7년 동안 살면서 노역했던 곳이기도 하다.



                      하멜기념관. 하멜은 전라병영성에서 7년간 살며 노역을 했다.

      

<하멜 보고서>를 써 서양에 우리나라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하멜이다.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원인 헨드릭 하멜 일행 36명이 제주도를 표류했다. 이듬해 서울로 압송되었고, 1656년에 전라병영성에 와 7년 동안 살며 노역했다. 그는 네덜란드의 이국적인 문화와 흔적을 이곳에 많이 남기고 1666년 고국으로 돌아갔다.

병영성 가까이 있는 하멜기념관은 이런 하멜의 생애를 기리고, 강진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와의 문화적 교류를 위해 개관했다. 타원형의 목조건축으로 지어진 왼쪽의 전시관은 하멜이 표착한 남도의 섬을 상징하며, 오른쪽 각진 형태의 건물은 망망대해에 표류한 조난선 스페르베르(Sperwer)호를 상징한다. 전시실은 <하멜보고서>를 비롯하여 하멜의 생애, 17세기 조선과 네덜란드의 사회·문화·역사적 상황 그리고 강진군과 네덜란드 호르큼 시의 자매결연 등 각 주제별로 감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전라병영성 근처 한골목에는 옛 담장이 있다. 이 마을의 담장은 특이하게 빗살무늬 방식으로 됐는데 하멜이 병영성에 억류돼 노역하면서 네덜란드식 빗살무늬 방식으로 돌담을 쌓았다고 전한다. 골목의 길이는 1.5에 이르는데 다른 곳과 달리 말을 타고 마을을 지나가는 병사 때문에 돌담이 다른 지역보다 더 높게 쌓았다고 한다.


강진만 생태공원에 갯벌, 코스모스, 남도음식 다 모였다

탐진강과 강진만이 만나는 강진만생태공원은 20만 평의 갈대군락지와 793만 평의 청정 갯벌을 자랑한다. 천연기념물 201호인 큰고니 등 철새 집단서식지 등 무려 1,131종의 생물들이 서식하는 생태의 보고이다. 갈대밭을 걸으며 자연과 호흡할 수 있는 3km의 탐방로 데크길이 마련되어 있는데 갯벌과 갈대 바다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또한 갯벌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짱뚱어와 농게, 칠게, 방게 등 갯벌생물을 관찰하며 걸을 수 있어 조금도 지루할 틈이 없다.



                      강진만생태공원은 20만 평의 갈대군락지와 793만 평의 드넓은 갯벌을 자랑한다.


갯벌 건너편에는 10규모의 광활한 코스모스 꽃밭이 펼쳐졌다. 키 작은 코스모스다. 코스모스 꽃밭 옆에는 남도음식문화큰잔치가 열렸다. 남도의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모두 모여 맛자랑을 하는 잔치다.



                   갯벌 건너편에 10규모의 광활한 코스모스 꽃밭이 펼쳐졌다.


                   남도음식문화큰잔치가 열렸다.


다산초당에서 500여 권의 책을 썼다

다산을 제대로 알려면 도암면의 다산유물전시관을 가봐야 한다. 다산의 업적, 저서 등을 전시하고 있는데 어떻게 한 사람이 정치, 경제, 과학, 의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저렇게 해박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하다. 대표적인 저서로 꼽는 <목민심서>는 지방행정의 일선 책임자인 목민관, 즉 수령들의 행정지침서로서 고을에 부임하는 날부터 퇴임할 때까지 지켜야 할 사항들을 기록한 책인데 현재까지도 많은 위정자의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 호찌민도 목민심서를 곁에 두고 읽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전시관에서 나와 다산초당에 간다. 들머리 산길은 특이하게도 큰 나무에서 뻗어져 나온 뿌리가 울퉁불퉁 길을 덮고 있다. 시인 정호승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 이름 지었는데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고 하였다



                     다산이 머물며 500여 권의 책을 쓴 다산초당. 올 때마다 왜 초당(草堂)이 아닌 와당(當)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다산은 1808년 봄,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의 산정(山亭)에 놀러 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웠던 이곳에 반해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거처를 옮긴 다산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다산초당에서 머무는 10년 동안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했다. 다산초당은 결과적으로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 공간이자 조선시대 실학의 산실이 된 셈이다. 다산이 직접 바위에 새겼다는 정석(丁石),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약천(藥泉), 솔방울을 지펴 차를 끓이던 다조, 바닷가의 돌을 주워 만든 연지석가산 등의 다산4이 있어 다산의 자취를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다산초당이란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 모각한 것이다.


   

                  천일각은 다산이 강진만을 바라보며 쓸쓸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란 생각으로 후대에 지운 누각이다.

             

다산초당에서 오른쪽 길로 가면 보정산방과 다산동암이 나오고 이어 전망 좋은 곳에 날아갈 듯 날렵한 정자 천일각이 세워져 있다. 다산이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로 유배 간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쓸쓸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란 생각으로 후대에 지운 누각이다.

 

강진에 귀양 오기를 참 잘했구나

다산에게는 혜장선사라는 벗이 있었다. 다산초당에서 오솔길 따라 30여 분 거리에 있는 백련사의 주지였던 혜장은 뛰어난 학승으로 학식과 식견이 높았다. 다산과 혜장은 수시로 만나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짓고 차를 즐겼다. 다산은 혜장이 비 내리는 깊은 밤에도 기약 없이 다산을 찾아오곤 해서 밤 깊도록 문을 열어두었다고 한다. 천일각 앞의 안내 팻말에는 이렇게 씌어있다. “다산과 혜장이 서로를 찾아 오가던 이 오솔길은 동백숲과 야생차가 아름답다. 그러나 이 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친구를 찾아가는 설렘일 것이다. 보고 싶은 친구를 가진 기쁨, 친구를 찾아가는 길의 행복.”

친구를 찾아가는 마음으로 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걸어가면 만덕산 자락에 자리한 백련사가 나온다. 봄이면 절 앞의 빽빽한 동백숲이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며 화려한 꽃불을 지핀다. 절에서 바라보는 너른 강진만의 조망도 일품이다. 아마도 다산초당에서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던 다산에게 백련사 가는 아름다운 오솔길은 큰 위안과 휴식처가 됐을 것 같다.

다산은 한때 절망에 빠져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강진에 내려온 후 내가 강진에 귀양 오기를 참 잘했다. 강진이 내 고향 땅 아니란 말 믿지 않으리라고 말할 만큼 강진의 인심과 자연에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만일 다산이 강진에 유배를 오지 않았다면 이처럼 방대한 저술과 학문을 후대에 남기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중앙에서 쫓겨나 초라하게 유배 온 한 사내를 따뜻하게 품어 거목으로 키워낸 건 팔 할이 강진의 힘이었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강진의 먹을거리>

 

허브정원

연잎밥 정식

성전면 월남길 83

061-433-0606


   

모란

한정식

강진읍 오감길 2

061-433-2211




강진만 갯벌탕

짱뚱어탕

강진읍 동성로 16

061-434-8288


   

월미도식당

낙지비빔밥

강진읍 보은로안길 18

061-433-6133

 

느루갤러리

카페, 갤러리, 펜션

강진읍 목리안33

061-433-3301



병영양조장

막걸리, 동동주, 소주

병영면 하멜로 407

061-432-14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