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의 옛 이름은 문희(聞喜)다.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는 뜻이다. 문경(聞慶)도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 지명에 뭔가 간절한 바람이 깃들어 있다. 조선시대 영남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기 위해 문경새재를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과거급제라는 꿈을 품고 괴나리봇짐을 멘 체 타박타박 걸어 넘던 이 과거길은 이제 선비들 대신 배낭을 멘 여행자들의 길로 바뀌었다.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이어지는 6.5km의 새재길을 걸어보자. 아름다운 자연과 길 곳곳에 깃든 역사가 도란도란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새재(조령·鳥嶺)라는 이름의 유래는 다양하다.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가 우거진 고개’, ‘새로 낸 고개’. 옛날 영남과 한양을 이어주던 고개가 셋이 있었다. 죽령, 추풍령, 새재.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들은 대부분 새재를 택했다. 죽령은 ‘죽죽 미끄러진다’ 하여, 추풍령은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떨어진다고 해서 피했다. 하지만 문경새재는 지명처럼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聞慶)’는 뜻이 있어 호남 지역의 선비들조차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이처럼 문경새재는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주요 교통로이자 한편으로는 국방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문경새재에는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등 세 개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모두 왜구와 오랑캐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쳐들어왔다. 그래서 이 길엔 옛 선비들의 자취와 함께 군사들의 대기소였던 군막터 등 병영의 흔적도 남아있다.
문경새재 제1관문에 들어서기 전에 문경 생태 미로공원에 들러보자. 2020년 4월 개장한 이 공원은 생태연못, 생태습지를 중심으로 도자기 미로, 연인의 미로, 돌 미로, 생태 미로 등 4개의 테마로 이루어졌는데 어른과 아이가 함께 즐기기 좋은 공원이다.
제1관문을 지나 조금 가면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이 나온다. 드라마 ‘태조 왕건’을 찍기 위해 촬영장을 물색하던 KBS에서 개성의 송악산을 많이 닮은 산세를 보고 이곳에 세트장을 지었는데 그 이후 우리나라 사극 촬영의 성지처럼 돼버렸다. 마침 세트장 곳곳에 벚꽃이 만발해 화사하기 그지없었다.
걷기의 출발점은 제1관문인 주흘관이다. 주흘관은 세 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다. 키 큰 나무 사이로 난 길은 걷기에 아주 편안하다. 부드러운 황토를 깔아 맨발로 걸어도 좋다. 길옆으론 숲과 맑은 계곡이 이어진다.
조금 더 걸으면 조령원터가 나온다. 출장 가는 관리들에게 숙식 등 편의를 제공하던 곳이다. 조령원터 가까이 있는 길가의 노송이 조금 이상하다. 나무 가운데가 깊게 패어 있다. 일제 말기 일본군이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송진을 채취한 자국으로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초가집 주막이 보인다. 험준한 새재길을 걷느라 피곤한 몸을 한 잔의 술로 달래던 곳이다. 주막 툇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쉬고 있자니 문득 주모를 불러 술 한 상을 청하고 싶다. 주막을 나와 다시 발걸음을 떼니 하늘로 용트림하는 듯 예사롭지 않은 소나무가 보이고 그 옆엔 날아갈 듯한 정자가 서 있다. 교귀정으로 조선시대 때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아 새롭게 부임하는 신임 경상감사와 업무를 마치고 이임하여 돌아가는 전임 감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곳이다.
교귀정을 지나 계곡을 따라가면 천주교 신자들이 피신했던 기도굴, 전설이 깃든 꾸구리바위, 조선시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비인 ‘산불됴심비’, 조곡폭포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연이어 펼쳐진다. 이윽고 제2관문인 조곡관에 도착했다. 조곡관은 세 관문 중 가장 먼저 세운 관문으로 관문을 지나면 쉼터와 조곡약수가 있어 목을 축이며 쉴 수 있다.
조곡관에서 마지막 제3관문인 조령관까지는 약간 경사진 길이다. 2관문에서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많지만 40분가량만 더 걸으면 닿을 수 있다. 조령관은 오랑캐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았기에 왜구의 침공에 대비한 제1관문과 반대로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조령관을 넘어서면 충청북도 괴산 땅이다.
조령관 근처의 평상에 앉아 땀을 식히고 있자니 아주 오랜 옛날 이 길을 넘나들던 수많은 선조의 모습이 마치 사극의 영상처럼 떠오른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 과거에 합격해 부푼 마음으로 금의환향하는 선비, 낙방해 실의에 젖어 무거운 다리를 끌며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선비. 진도 아리랑은 낙방한 선비가 불렀던 걸까.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원 / 지리산 바래봉 (0) | 2023.05.15 |
---|---|
남원 / 서도역과 혼불문학관 (0) | 2023.05.14 |
한국유교문화진흥원과 종학당 (0) | 2023.03.12 |
논산 선샤인랜드 (0) | 2023.03.12 |
<경남 고성 소을비포진성> (0) | 2022.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