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는 전주와 나주를 합한 이름이다. 고려시대 나주목이 된 이래 조선시대 전라남도 관찰부가 광주로 옮겨지기 전까지 전라도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 읍을 한 바퀴 뺑 둘러싸고 있던 나주읍성은 고려시대 왜구방어를 위해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돌을 이용한 석축성으로 고쳐 쌓았다. 성벽의 원래 길이는 3.7km로 평지에 남북으로 긴 타원형으로 동점문, 서성문(영금문), 남고문, 북망문 4개의 성문을 갖추고 있다.
북망문에서부터 나주읍성 구석구석 여행을 시작했다. 북망문은 임금이 있는 북쪽을 바라본다는 뜻을 가진 성문으로 4개 성문중 가장 마지막으로 복원된 성문이다. 가까이에는 천주교 나주성당이 있다. 나주 성당 옆으로 무학당 순교터가 있고,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으로 사용했던 기와집이 남아 있다. 이 기와집은 1959년까지 수녀원으로 사용하다가 본원이 광주 학동으로 이전하면서 건물만 남았다. 이 건물은 지금은 작은 역사기념관으로 꾸며 옛 사진과 기도서, 성물과 유물, 생활용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향토음식 체험문화관은 1930년대 지은 민가 형식의 한옥으로 김중민이란 사람의 가옥이었다. 붉은색 벽돌 건물은 1960년대에 막걸리를 만들던 불로주조장으로 나주 3대 주조장 중 하나였다. 지금은 나주시에서 리모델링해 향토음식 체험문화관으로 쓰고 있다.
나주정미소는 1920년대 지은 호남 최초, 최대의 정미소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이 모여 회의했던 항일운동의 현장이기도 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나주역 사건의 주인공 박준채는 정미소 설립자 박준삼의 동생이다. 금호아시아나 그룹 창업자 박인천 회장이 1950년부터 1971년까지 ‘죽호정미소’라는 이름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1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나주정미소는 지금은 나주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정미소 부지에 자리한 4동의 건물을 리모델링해 시민들을 위한 문화공간, 예술 전시공간, 뮤지션들의 창작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이미 단장을 마친 건물은 공연장으로 쓰고 있다.
동문 밖 석당간은 고려시대 만든 당간으로 보물 제49호로 지정되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본래 당간은 절 앞에 세워지는데, 이곳에 절이 있었다는 역사 기록은 없고 다만 풍수설에 의거해 나주의 땅 모양이 배 모양이기 때문에 안정을 빌기 위하여 당간을 돛대로 세운 것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동점문 가까이에는 지금은 문을 닫고 부지만 남은 화남산업이라는 곡절 많은 통조림 공장이 있다. 1930년대 일본인이 2,700여 평 규모로 지은 공장으로 전쟁 나간 군인들을 위한 쇠고기 통조림을 생산했다. 하루 2,300마리의 소가 도축되어 주변 재신천이 소의 핏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정문 안쪽에 소 위령비를 세워놨다.
공장 노동자에게는 노동의 대가로 소고기 부산물을 제공했는데 그것을 나주 오일장에서 끓여 판 것이 오늘날의 나주곰탕이라는 설이 있다. 해방 뒤에는 한국인이 불하받아 황도 복숭아와 깻잎 통조림을 만들었다. 1955년 월남전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월남 파병한 한국 병사들을 위한 김치 통조림을 생산하기도 했다. 나주시는 앞으로 폐허가 된 공장 부지를 리모델링해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나주역사는 1913년 호남선이 개통되며 지었다. 1929년 10월, 나주 한국인 통학생과 일본 학생 간의 다툼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인 학생 독립운동으로 확산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154개교 54,000여 명의 학생이 참여한 일제하 3대 독립운동 중 하나로 학생 독립운동의 진원지라 할 수 있다. 나주역사 옆의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이러한 역사를 생생하게 일깨우고 정신을 계승하고자 건립한 것이다. 제1전시실은 ‘민족 항쟁의 땅, 나주’, 제2전시실은 ‘나주학생독립운동’을 주제로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꾸몄다.
금성동의 구)나주경찰서는 1910년에 일본이 세운 건물이다.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단순한 형태의 2층 건물로 창문과 출입구 등 건물의 외관상 중요한 부분에 흰색 페인트를 칠했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항일운동가들이 수감되었으며 지하 고문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던 곳이다,
나주경찰서 길 건너편의 구)금성파출소 예비군 무기고는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이 광주 시민을 학살하자 나주 시민들이 항쟁에 동참해 무기고를 부수고 소총, 실탄, 수류탄을 걷어 광주로 이송해 5·18민주항쟁에 도움을 줬다.
나주나빌레라문화센터는 일제강점기인 1910년 일본인이 세운 후 970년대 후반까지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냈던 구)나주잠사공장을 리모델링하고 증축한 시설물이다. 나주 지역 문화예술 활동의 거점이자, 나주 시민의 다양한 문화 향유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서성문 성곽 옆 나주신청문화관은 일명 소리정원이라고도 부른다. 나주정씨 고택을 옮겨와 지은 것이다. 조선시대 예술인 단체이자 삼현육각, 판소리, 산조 등 전통예술의 산실이었던 나주신청(羅州神聽)을 기억하고자 나주신청문화관이라 이름 지었다. 판소리, 창극, 국악기 등 전라도 소리문화와 공연 예술 체험 공간으로 쓰고 있다.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원 만복사지(萬福寺址) (0) | 2023.09.25 |
---|---|
인천아트플랫폼 (0) | 2023.09.09 |
국립나주박물관 & 나주 복암리 고분전시관 (0) | 2023.07.02 |
강진 고려청자박물관 (0) | 2023.06.20 |
월출산으로 차소풍, ‘이한영차문화원’ (0) | 2023.06.19 |